저희 친정아버지는 어부였어요. 그래서 광부일은 잘 몰라요. 근데 남편 시어른이, 시아버님께서는 여기서 광부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 자식이 광부 일이 그때는 지금도 힘들지만, 그때 당시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정말 많이 힘들어서 거기 만약에 (광산에서 광부일)하면 막 사고율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자식은.. 내 자식들은 여기 안 넣겠다고, 이사 퇴직을 하시고 가신 거죠. 그랬는데 결국은 자식이 또 여기를 오게 됐어요(웃음). 그게..(말을…

광부로서 지금 기록에 남는 거는, 그러니까 저희가 안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 그리고 저희가 일해서 캔 탄이 나가서 연탄으로 만들어져서 어떠한 과정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느끼면서 따뜻하게 겨울을 보낸다는 그런 것. 그리고 이 광부도 “진짜 사람이구나 열심히 일한 만큼 열심히 살고 있구나” 이런 모습. 그리고 “이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진짜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진정 그런 모습.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런 기록들이…

광업소에 입사하기가 쉬웠어요. 쉬웠는데, 이제 쉬웠던 이유는 일단 많은 사람을 필요로 했고 또 거기에 맞춰서 월급을 좀 많이 주는 직장. 당시 공무원들보다도 월급을 많이 줬으니까. 아마 그런 부분에 대해서 광업소, 이 탄전 지대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았나 싶어요.

이게 (저)같은 경우는 경제적인 부분이 있다 보니까 입사를 하게 됐는데, 이게 일이 힘들고 힘들지 않고 그런 부분을 떠나가지고 제가 일단 이제 가족을 지켜야 된다는 그런 사명감도 좀 있었고, 먹고 살아야겠다는 이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이런 거는 처음에는 입사할 때는 없었습니다. 근데 실제 갱도에 들어가니까 그 공포는, 처음에 들어가는 사람의 공포감이란 거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할…

제가 고향이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이라는 항구가 있어요. 제가 배를 타봤어요. 타보니까, 멀미가 나서 도저히 못 타는 거예요. 저는 꿈이 죽변에서 바닷가에서 태어나다 보니까, 원양어선을 타고 참 타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는데. 도저히 멀미가 나서 배를 못 타겠더라고요. 그런데 애들하고 먹고는 살아야 되고 마땅히 갈 데가 없고 하다 보니까, 완전히 광산촌에 오게 됐어요. 저는 한편으로 봐서는 광산이 굉장히 고맙다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애들…

아무래도 충주가 고향이다 보니까, 그쪽에는 공장지대가 그때는 없었습니다. 거의 농사짓는 사람들 외에는 참 다들 가난하게 살았고 그래서 형제 남매들 간에도 먹고 사는 게 참 힘들었죠. 그래서 제가 어린 나이지만은 빨리 깨닫고 아, 탄광에 가면은 돈도 많이 주고 이래서 한번 그럼 가보고 (싶다)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 이런 마음에서 어린 나이에 오게 됐습니다.

파독 근로자 김희진은 파독광부 중에서 성공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아시아 총괄 사장을 맡다가 고위직으로 퇴임하였다. 그가 독일에서 성공한 배경에는 남다른 스토리가 있다.